회원방 | 중앙회소개 | 전국시도지부 | 베.참전우마당 | 베트남전과한국군 | 6.25전쟁과UN군 | handTV |

회원등록 비번분실
Trans lation(번역)
pasthome.jpg

War buddy library

 인강칼럼

 남강칼럼

 화곡칼럼

 금촌댁
오늘의역사

pasthome.jpg

 qqqvietnam
월남전과 한국군   역사와 호국정신
파월 국군의 희생이 대한민국 재건에 미친 공헌 자료실 입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2-19 (토) 21:56
분 류 성과
ㆍ추천: 0  ㆍ조회: 490      
IP: 115.xxx.45
[베트남전 외교문서 추가공개]한국군 근무수당 比-泰와 비슷

입력 2005-12-03 03:00:00 수정 2009-09-30 21:09:29

 

국방부는 2일 베트남전쟁 관련 외교문서 총 17권 1700여 쪽을 공개했다.

이는 정부의 베트남전 관련 외교문서 중 8월 말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로 당시 파병 과정과 파병 장병의 해외 근무수당 실태, 한국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을 둘러싼 한미의 첨예한 갈등 등을 담고 있다.  ▽미국, 전투수당 지급 제의 거절=1969년 4월 국방부는 ‘파월장병 처우개선’이란 문건에서 파병 장병들이 미군 수준의 전투수당을 받도록 미국과 협의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당시 군인보수법에는 전시 사변 등 국가 비상시 전투에 종사하는 장병에게만 전투수당을 지급하게 돼 있어 파병 장병들은 전투수당을 받을 수 없었다. 국방부는 “해외 근무수당은 본인과 그 가족의 생계유지비로 전투 위험에 대한 보상이 아니며 비록 전시 사변은 아니지만 국가를 위해 전투에 종사하는 만큼 미국 측에 관련 수당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추가 부담은 곤란하다며 한국의 제의를 거부했다.  ▽해외 근무수당 수준=파병 장병들이 미국에서 받은 해외 근무수당은 당시 우리보다 국민소득 수준이 높았던 필리핀이나 태국 군인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준장의 경우 한국군과 필리핀군은 모두 매달 210달러를, 중령의 경우 한국과 필리핀군은 180달러 태국은 210달러를, 소위는 세 나라 모두 120달러를 각각 받았다.  국방부 관계자는 “그동안 필리핀군이 당시 해외 근무수당을 한국군보다 배 이상 받은 것으로 알려진 것은 자국의 해외 근무수당까지 포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번 문서 공개를 통해 밝혀졌다”며 “파병 장병의 수당을 정부가 전용했다는 해묵은 의혹이 해소됐다”고 말했다.  한편 참전기간(1965∼1973년) 파병 장병의 해외 근무수당은 총 2억3556만 달러로 이 중 1억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됐다.  ▽지역안보기구 창설 구상=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1960년대 말 아시아 지역에 공산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과 일본, 대만이 주축이 된 지역방위기구 창설을 구상했다.  박 대통령은 “실효성 있는 복안으로 미국과 (기구 창설 문제를) 교섭하라. 우리가 희미하고 눈치 보는 자세를 취해선 공산주의에 대처할 수 있는 확실한 기구를 형성할 수 없다”고 지시했다.  하지만 관련부처에서 일본과 대만을 제외한 시안(試案)을 작성했고 현실성이 떨어져 중도에 포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타=1960, 70년대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 참전국들을 상대로 활발한 반북(反北) 외교전을 벌였다. 최규하(崔圭夏) 외무부 장관은 매년 열린 참전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북한의 각종 도발행위를 성토하며 전면 남침 가능성을 경고했다. 한편 미국은 파병 기간 전사 또는 부상한 한국군 장병에게 총 65억563만 원의 재해보상금을 지급했다. 전사자 4968명에게 29억9245만 원, 부상자 8004명에게 35억1317만 원이 각각 지급됐다.  군별로는 육군(1만282명) 53억2260만 원, 해병대(2621명) 11억4451만 원, 해군(78명) 3705만 원, 공군(1명) 45만7600원 순이었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기자 블로그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이미지 클릭후 새창으로 뜨는 이미지에 마우스를 올려보세요. 우측하단에 나타나는 를 클릭하시면 크게볼 수 있습니다.)

■ NPT가입 싸고 韓美충돌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한국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 문제를 놓고 한미가 신경전을 벌였다. 당시 미국은 윌리엄 포터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NPT 체제의 안정적 출범을 위해 한국의 가입을 종용했지만 최규하 외무부 장관은 “NPT에 가입하면 핵보유국이 핵무기를 주지 않고 핵무기 개발도 못한다”고 맞섰다.  최 장관은 또 “NPT에 서명하지 않은 중공이 핵무기를 (북한에) 줄지 모르고 북괴가 이를 매입할지도 모른다”며 별도의 안전보장을 강력히 요구했다.  공방에 지친 포터 대사는 “한국이 질질 끌다 ‘불쾌한 그룹(unpleasant group)’에 끼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는 비외교적 발언까지 했다. 이에 최 장관은 “가장 맹방인 한국을 설득하지 못하는 귀하가 무슨 대한(對韓) 외교를 잘한다고 말하느냐”며 맞받아쳤다. 결국 포터 대사는 NPT 가입에 따른 안전보장을 재확인하는 미 정부의 각서를 한국에 제시했고 이후 몇 차례 수정을 거쳐 합의가 이뤄진 뒤 한국은 1975년 4월 23일 NPT의 정식 비준국이 됐다. 
-동아일보-
  0
3500

Copyright www.vwm.co.kr All Rights Reserved
◆관리자 ◆HP 010-8790-7549 ◆(vwm44@naver.com)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