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방 | 중앙회소개 | 전국시도지부 | 베.참전우마당 | 베트남전과한국군 | 6.25전쟁과UN군 | handtv | YouTube

회원등록 비번분실
Trans lation(번역)
  Community  
4.전체보기
공지사항
자유게시판
고엽제 후유의증
음악/사진
전우를찾습니다.
참전단체소식
호국단체행사
그때그사진
전우문고
pasthome.jpg

War buddy library

 인강칼럼

 남강칼럼

 화곡칼럼

 금촌댁
오늘의역사

pasthome.jpg

 free talk box
토크박스   이야기 나눔 게시판
특별한 주제가 없어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비방글이나 광고글은 금지합니다.
작성자 참전자
작성일 2015-03-27 (금) 10:32
ㆍ추천: 0  ㆍ조회: 743      
IP: 106.xxx.203
전우여러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까요 고견을 듣습니다.
구수정 이라는 나뿐 여자 하나가 우리 베트남참전 역사를 폄훼 하고 일본의 위안부 문제를 일본을 편들어 물타기 하는 패륜 행위에 대해 피해 당사자인 우리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 지 전우님들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평화회관.... 어쩌고 하는 위선단체 홈페이지를 직접 방문해 보시고 생각 되는 바를 댓글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http://www.peacemuseum.or.kr/6309  [옆의 주소를 클릭 하십시오]


-구수정 일본 잡지와의 인터뷰-
================================
<한국인 여성 저널리스트 실명고발>  週刊文春(10.16)
“조국의 죄를 폭로하고 ‘일본의 앞잡이’로 매도당한 나”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어느 세대나 지역을 불문하고 인권과 인도주의에 명백히 반하는 행위입니다”
9.24 UN총회에서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했다. 일본군의 종군위안부 문제를 염두에 둔 발언. 박 정권은 발족 이후 일관되게 위안부 문제가 보편적 인권문제라며 일본에 대해 사죄를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 발언은 너무나도 일방적이라서, ‘어떤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베트남에 있었다.
“과연 일본인만 나쁜 걸까요? 한국인 역시 과거 베트남전쟁에서 참혹한 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한국사회는 아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본지의 취재에 이와 같이 실명으로 고발한 사람은 한국인 여성 저널리스트이자 평화활동가인 구수정씨(48). 구씨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어두운 면을 처음으로 폭로한 저널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현재도 베트남에 머물며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범죄에 대해 치밀한 조사를 계속해나가고 있다.
 본지는 구씨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기위해 호치민으로 향했다. 그녀가 일본 언론과의 긴 인터뷰에 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취재는 3시간 가량 이루어졌다. 이미 17년여를 허비한 조사활동의 단서를, 구씨는 이렇게 회상하기 시작했다.
“내가 베트남전쟁에서 있었던 학살문제를 알게 된 계기는 1997년 입수한 한편의 자료였습니다. 당시 나는 호치민대학에 유학중이었으며, 석사과정을 마치고 논문 테마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자료는 베트남의 정치국 전쟁조사위원회가 정리한 ‘南베트남 한국군 범죄’라는 중간보고서였습니다. 그 자료에는 한국군이 5천 명가량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내용이 너무나도 처참해서,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자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첫 몇 년간은 고민했습니다. 결국 나는 자료에 아직 쓰여 있지 않은 사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우선은 대량의 고려인삼을 왜건에 가득 실었습니다. 직접 알아보자, 차를 돌리며 학살 피해를 받았다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보자, 라고 결의를 다졌습니다.”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정권시대의 일이다. 내전에 개입한 미국이 北(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개시, 베트남전이 본격화. 1964년부터 지원부대를 파병한 한국도 파병을 결의, 南베트남으로부터의 요청이라는 명목으로 1965년 집단적자위권을 행사, 박 대통령은 32만명에 달하는 병사를 전지에 투입한 것이다.
파병된 부대는 맹호·청룡·백마 3부대였다. 대규모 학살이 자행된 곳은 주로 후이엔·빈틴·쿠완가이·쿠안남 4개 지역. 이들 지역 모두 한국군 주둔지 주변이다. 한국군은 베트남인으로부터 ‘다이한(대한)’, ‘박정희의 병사들’이라고 불리우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생존한 분들로부터, 마치 토끼사냥이라도 하듯 마을사람들을 뒤쫓아 수류탄을 던졌다던가, 막 태어난 아이를 40명도 넘게 살해했다는 등의 처참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수류탄 이외에도, 기관총으로 사살하거나 동굴로 도망간 마을사람들을 최루가스를 태워 총살하는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학살의 이유는 한국군 기지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기지 주변에 마을이 있으면 집에 적이 잠복하기 쉽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을 전략촌(사실상의 수용소)으로 이주시키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으려 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1mm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슬로건을 걸거나 나무에 달라붙어 전략촌 이주를 거부하는 주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국군이 선택한 방법이 학살이었던 것입니다. 학살의 85%는 1966년에 집중되어있습니다만, 대부분 기지건설 때문이었습니다.”
1968년에도 학살이 있었지만, 이 해는 베트콩의 반격이 있어서 보복으로서의 학살이라고 받아들여져 있다고 한다.
“주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은 맹호부대였습니다. 학살방법은 대부분 한 곳에 마을사람들을 모아두고 수류탄이나 기관총으로 살해하는 것이었습니다만, 때로는 칼로 참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자이 마을에서는 300명 이상의 주민이 한 곳에 모여 1시간여 동안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또 한국군에 의해 베트남여성이 강간, 윤간당한 이야기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의 대부분은 살해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강간 피해자의 직접 증언이 극히 적습니다. 빈틴에는 학살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습니다. 학살이나 강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서, 한국군이 행한 만행이 리얼하게 되살아납니다. 베트남인의 한국군에 대한 원한이 피어나는 듯한 벽화입니다.”
한국군의 소행은 ‘인권과 인도주의에 반하는 행위’라는 손쉬운 표현으로는 담을 수 없을 만큼 비인도적인 것이었다.
“내게 있어 벽화보다 더 큰 충격이었던 것은 위령비와 비석이었습니다. 위령비 뒤에는 돌아가신 분의 이름과 성별, 태어난 해가 새겨져있었습니다만, 한눈에도 'THI'라는 표기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성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1965~1968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것은 막 태어난 아기들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학살당한 이들의 20%는 아이, 60~70%는 여성이었습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전시에 마을에 남겨진 것은 여성과 아이, 노인들 뿐이었다. 한국군은 이런 마을에 들어가서 학살을 반복한 것이다. 구씨의 조사에 따르면, 학살은 판명된 것만 80여건, 피해자는 9천명 이상이라고 한다.
“내가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한 1999년은 베트남 전쟁 30주년이었습니다. 어느 마을을 방문해도 30년 동안 한 번도 한국인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어느 마을에 가도 사람이 100여명 가량 몰려들어 'kai', 'kai'라며 손을 들었습니다. 'kai'란 ‘진술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수십 년이나 봉인되어있던 역사를 그들은 한국인인 나에게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조사중, 신변의 위협을 느낀 적이 한번 있었다고 한다.
“빈틴성의 타이빙 마을에서 어느 노파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노파는 한국군에게 총을 맞고 머리에 구멍이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 그 노파를 돌봐주는 남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만일 내 아이가 살아있다면 너 정도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라며 흥분해 나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1966년 1월생. 정말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학살을 반복하기 시작한 시기와 겹칩니다. 결국 그때는 내가 얻어맞고 있는 모습을 본 ‘로’ 할아버지라는 분이 달려와 내 위에 엎드려 구해 주었습니다. 조사 중 베트남인에게 구타당한 것은 그 때 한번뿐이었습니다. 나를 때린 베트남인도 30분쯤 뒤 냉정을 되찾고 내게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딸이 학살당했을 당시의 모습을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는 딸이 3명 있었는데, 막내는 막 태어났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 아이가 한국군의 수류탄에 살해당했습니다. 작은 몸이 조각조각 나서, 팔은 나무위에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남자는 울면서 시신을 수습했던 것입니다......
나를 구해준 ‘로’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모두 한데 모여 술을 마셨습니다. 콘다라는 지역술이었습니다. 남자도 울었습니다. 나도 울었습니다. ‘로’ 할아버지도 울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마을사람들도 모두 울면서 술을 마셨습니다.”
구씨는 45일간에 걸친 조사를 끝내고 한가지 결심을 했다. ‘이 내용을 한국 언론에 공개하자.’ 1999년 5월, 한겨레신문이 발행하는 주간지 한겨레21에 구씨는 조사결과를 발표. 베트남전쟁에서 있었던 한국군의 만행이 백일하에 밝혀진 것이다. 그녀의 고발기사를 계기로 2000년 4월 한겨레21에는 학살을 자행했다는 前 한국군인의 증언이 게재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 美 뉴스위크紙에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만행이 게재되었다.
반응은 격렬했다. 2000년 6월, 한겨레신문사에 베트남전쟁 퇴역군인 2,400여명이 결집. 기사에 대한 항의집회를 연 것이다. 군복을 입은 퇴역군인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사옥에 난입. 컴퓨터와 윤전기를 파괴하고 서류와 차에 불을 지르며 신문사 업무를 정지시켰다.
“한겨레신문이 습격당한 날, 어머니로부터 베트남에 있는 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집 주변 도로의 벽이 새빨갛게 칠해지고, 현관 앞에는 염산이 들어있는 드럼통 3개가 놓여져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베트남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위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협박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일본의 앞잡이!’, ‘공산주의자’, ‘매국노’, ‘여자라서 다행인줄 알아라’ 등의 협박이었습니다. 실은 기사를 내기 전부터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한국 국내에서 종군위안부가 문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전후, 50년 가까이 지나며 가해자도 피해자도 그리 많이 생존해있지 않은 시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트남전의 참상은 1999년 당시, 아직 30여년밖에 경과되지 않았었고, 현역 군 간부가 존재했으며, 퇴역군인도 아직 50대였습니다. 기사를 내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걱정했던 대로의 강렬한 반응. 퇴역군인들의 상식을 벗어난 행위로 인해 ‘역사를 직시하고 싶다’는 그녀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얄궂게도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학살문제’는 터부가 되어버렸다.
실은 박근혜 대통령 본인도 ‘역사봉인’에 가담한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당시)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본의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점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학살을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죄의 뜻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발언에 대해 당시 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씨는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인식을 우려한다. 역전의 병사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라고 격렬히 비판했다.
작년 9월,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 그러나 그녀가 언급한 것은 경제문제뿐이었다. 구씨는 한숨을 지었다.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베트남에 대한 사죄의 말조차 없어졌습니다.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문제는 크게 후퇴해버렸습니다.
 작년, 그녀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나는 빈호아라는 곳에서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도안 운이아’ 라는 남성에게 들은 이야기는 장렬했습니다. 그는 생후 6개월 당시 학살사건에 말려들었습니다. 한국군은 마을사람들을 모아 최루가스를 터트리고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아기였던 그는 우연히 시체더미 밑에 깔려있던 덕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최루가스로 가득차있던 와중에 시체더미에 장시간 깔려있었던 탓으로 피와 빗물이 눈에 들어가 실명했습니다. 또한, 도안씨를 취재하고 있던 베트남 방송국 기자로부터 이렇게 추궁당했습니다. ‘어째서 당신 나라는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까!’라고.”
올해는 한국군 베트남 참전 50주년이다. 구씨의 최초 보도로부터도 15년이 흘러, 많은 베트남인 피해자도 고령화, 사망자가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아직도 학살문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사죄나 보상동향은 없다. 한국사회 역시 한겨레신문사 습격사건 이후 불편한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다.
한국 언론은 자신을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의 민족’,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는 민족’이라고 자화자찬하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일본을 추궁한다. 구씨는 지금 조국에게 어떤 감정을 느낄까.
“한국은 아직 사회 성숙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군인이 사죄를 표명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을 합니다. 미국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사회가 있습니다. 만일 한국에서 같은 일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의 퇴역군인이 사죄를 하면, 한국사회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겠지요. 스스로의 죄를 인정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가 아직 형성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언동을 볼 때, 현 정권에서 한국사회가 성숙해지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박대통령은 UN에서 여성인권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따로 말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만일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UN에서 베트남전쟁에서 있었던 한국군의 행위에 대해 사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세계에서 뉴스가 되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기회를 그녀는 뻔히 알면서 놓쳐버렸습니다.
내 기사는 ‘조국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강한 반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은 사죄해야 한다’, ‘감동했다’ 등 격려의 메일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기사를 읽은 사람들 중에는 일본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는 이상으로 자신들도 확실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퍼져가고 있습니다. 위령 목적으로 베트남을 방문하는 퇴역군인도 생겼습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범한 죄를 직시하는 것은 한국이 극단적인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막는 브레이크가 될 것입니다. 서로의 과거를 정식으로 다시 바라보는 과정을 거쳐야 한국과 일본은 ‘보편적 인권문제’로서의 역사문제를 서로 논의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나는 역사의 사실을 전하는 활동을 앞으로도 베트남에서 계속 펼쳐나갈 계획입니다.” 끝.
  0
3500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355 국외거주자 2015 상반기 지급액 2개월분 36만원 자동 삭감(기발한.. 자성 2015/07/21 480
1354 영상 국민이 베트남전을 알아가는 방식 3부두 2015/07/16 1035
1353 그놈 목소리 각설이 2015/07/13 364
1352 전우 해병대 대위J.S. Park / 대위 J.Y. Lee 양지훈 2015/06/29 2552
1351 영상 청미래 자서전 두잇 프로젝트 월남전 2015/06/26 823
1350 영상 한국 돈벼락이 쏟아진다. 월남전 2015/06/23 758
1349 영상 독도는 한국땅 월남전 2015/06/18 648
1348 영화 "국제시장" 미 연방의사당에서 특별상영 미전우 2015/06/05 1143
1347 광주 계엄군 명예회복 월남전 2015/06/03 430
1346 월남 최전선의 JP 월남전 2015/06/02 617
1345 서독 함보른 탄광 막장 들어간 JP 월남전 2015/06/02 796
1344 육신을 묶고 시위 하는 월남전참전자 미망인회 [2] 화이팅 2015/05/12 769
1343 우리나라는 한자를 약자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환명 2015/05/08 1019
1342 Talking Proud Archives --- Military 참전자 2015/05/05 1430
1341 민간인 학살론 과 베트남전의 한국군-4 참전자 2015/04/28 1009
1340 민간인 학살론 과 베트남전의 한국군-3 참전자 2015/04/25 724
1339 민간인 학살론 과 베트남전의 한국군-2 참전자 2015/04/24 710
1338 민간인 학살론 과 베트남전의 한국군-1 참전자 2015/04/23 784
1337 전우여러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까요 고견을 듣습니다. 참전자 2015/03/27 743
1336 남북이 모두 버린 국군 포로 안학수 하사를 아십니까? 몰인정 2015/03/24 1507
12345678910,,,74

Copyright www.vwm.co.kr All Rights Reserved
◆관리자 ◆HP 010-8790-7549 ◆(vwm44@naver.com)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