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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강
작성일 2011-08-07 (일) 09:16
분 류 남강
ㆍ추천: 10  ㆍ조회: 1794      
IP: 115.xxx.39
“『장사(長沙)상륙작전』을 아시나요?”

<장사 상륙작전>=대담=

장사상륙작전 동지회 김영재 회장

아-아 6,25전쟁 --- 그 때

“『장사(長沙)상륙작전』을 아시나요?”

1950년 6월 25일 미명,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벌어진 6,25한국전쟁이 얼마나 치열했으며 비참했던가? 국군은 3일 만에 수도서울을 적군에게 내주고 밀리고 밀리기를 한 없이 계속하여 그 해 9월 중순에 이르러 낙동강 최후 방어선까지 후퇴, ‘이제 더 이상 밀리면 대한민국은 망한다.’고 절규하며 사력을 다하는 중에 이승만 대통령은 전선에 나와 장병들의 손을 잡고 “여기만은 꼭 지켜 달라!”고 호소에 가까운 당부를 했을 정도였다. 전 국토의 90%에 가까운 땅을 잃고 포진한 포항, 영일, 안강 기계, 영천, 신령, 다부동, 현풍, 창원, 마산, 진동고개 등 거점을 연하는 최후 저지선…

이 전선이 만일 어느 한군데라도 뚫렸다면 우리 전 국토는 아마 붉은 군대의 발굽 아래 짖밟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 때 UN군 사령관 맥아더는 은밀하게 인천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된 것은 남한 국토 전 지역을 석권, 기세를 떨치던 북한군의 허리를 자른 기발한 전략 이었던바 서해 인천항은 조류 간만의 차가 매우 크고 적군의 방비 또한 단단할 것인 즉 이러한 제반 여건상 도저히 성공하기 어려운 작전이라고 맥아더 주변의 참모들이 극력 반대했었다는 후문이었으나 맥아3더 UN군 사령관은 결국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에 한 미 해병대로 하여금 이를 결행 성공시킴으로써 한반도 전황을 반전시키는 계기를 삼았고 이로 인하여 맥아더는 세계적인 전략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전국토를 잃고 한반도 동남지역 1만여 평방Km 안에 갇혀 결사항전을 해야만 했던 한국군으로 하여금 전세를 역전 북진으로 나가게 하는 전기(轉機)가 되었던바 그야말로 세계전사의 빛나는 그 전사(戰史)의 이면에는 눈물겹고 비장한 희생의 제물이 있었음을 6,25 전쟁사는 기록하지 않았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까마득히 모른다.

이름도 생소한 ‘장사상륙작전’… 일반국민은 물론 전쟁의 역사를 꽤나 안다는 군사연구가들까지도 거의 모르는 전투, ‘6,25때 그런 전투가 있었던가?’ 할 정도로 묻혀 진 비사(秘史)로 사라져 버릴 뻔한 776명의 의병(義兵)들의 역사가 있었다.

기자는 우연히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6월 어느 날 서울역 서부 뒷골목 철도유공자동지회 건물 옥상에 자리한 5평 정도의 가건물에 책상 2개를 놓고 있는 초라한 사무실을 발견했고 거기서 류병추 사무총장이라는 분의 명함『학도의용군, 국가유공자-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을 받았다. 이튿날 필자는 회장이라는 분을 만나기 위해 다시 그곳을 찾았다.

김영재(金榮宰) 회장은 80고령에도 차마 묻어버릴 수 없는 이야기가 많아서인지, 동지들의 명예회복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어서인지 기자 앞에 여러 가지 자료를 내 놓고 열심히 설명을 하였다. 기자는 그 분의 말을 들으면서 “현대판 의병이 또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세인들은 맥아더의 인천상륙만을 보고 듣고 알았지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인‘장사상륙작전’은 전연 모른다. 단지 이들은 희생의 제물일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맥아더는 치밀했었다. 모든 사람들 심지어 미 본토 합동참모본부에서까지 반대하는 ‘인천상륙’을 계획하면서 공산군을 철저히 속이기 위해 동해안에서 양동작전을 펼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희생물

장사상륙작전(長沙 上陸作戰)은 6,25 이후 지금까지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기록도 없는 것을 보면 맥아더 사령부와 한국군 고위층만이 아는 극비의 작전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다만 그 때 작전에 참여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자들에 의한 증언으로만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하는 현재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이하 편의상 장사유격대로 한다) 김영재 회장과 류병추 사무총장의 진술을 토대로 기술함을 밝혀둔다.

장사학도의용유격대는 그 조직과 임무수행 과정을 살펴볼 때 순전히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희생물로 급조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1950년 8월 중순 당시 국회국방위원인 최윤종 의원이 대구에서 모병을 시작해 560명을 확보하고 부대는 육본 직할 ‘유격제1대대’를 조직하게 되는데 병력은 80%이상이 10대의 학생이었고 나머지는 20대 초반을 넘지 않은 피난민 청년들이었다. 대대장은 전투병과가 아닌 정훈장교 이명흠 대위(육사5기로 육본 정훈국 근무 중)였으며 참모 및 중대장 소대장은 방위군 사관들이 맡았으니 이로 미루어볼 때 이 부대는 정규전으로 사용할 목적이 애당초 아니었음을 추정케 하는 것이다. 이 부대는 이어 밀양으로 이동하여 추가인원을 약 772명으로 보강하여 8월 24일부터 9월 9일까지 2주일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10일 밤 부산으로 이동, 육본(피난 중)에서 인민군 출신인 박창암 소위로부터 괴뢰군 말씨 행동 등 특수교육을 이틀간 받은 후 작전에 투입하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이 날은 신성모 국방장관, 강문봉 육본 작전국장 등 최고위 인사들이 나와 이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돋우어주었다.

이 엉터리 부대(대대)는 이 때 사단으로 위장, 대대장(이명흠 대위)은 별을 달고 사단장 행세를 했으며 중대장은 연대장, 소대장은 대대장 등으로 위장하였으니 희한한 군사연극(?)이 시작된 것이다.

드디어 이 위장부대는 9월 13일 아침 무기, 탄약 3일 치 식량 등을 보급 받고 2천700t급 문산호에 탑승하여 사기충천한 가운데 북으로 항진하여 14일 새벽 포항 북방 약 30Km지점의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백사장 앞바다에 이른다. 여기서 비로소 이종흠 부대장은 “부대는 가급적 많은 병력이 움직이는 것처럼 위장하며 전방 장사해안의 200고지를 점령하고 적을 교란하라”는 작명 174호를 받는다.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적의 정면을 공격해 점령하라는 이러한 작명은 상식적으로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미 연합군의 성동격서의 책략이 있었음에랴 누가 이를 탓할 것인가? 다만 이들은 책을 버리고 총을 잡은 애국 청년들... 군대가 뭔지, 전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싸움터에 나선 것이기에 불같은 의지로 임무를 수행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고? 상륙작전이 개시되기도 전에 동해안을 강타한 태풍 '케지아'호에 밀려 배가 좌초하고 말았다. 비운의 LST문산호와 함께 유격대의 운명도 진퇴양난에 처했다. 해안에는 4~5m의 높은 파도가 배와 모래사장을 삼킬 듯이 휘몰아치고, 갑판위에는 총탄이 비 오듯 날아왔다. 대대장은 '상륙'을 독촉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함정의 문을 열자마자 거센 파도가 들이닥치며 5, 6명의 대원을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해송에 밧줄을 연결하기 위해 6명의 특공조가 바다에 뛰어 들었으나 역시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연이어 바다에 뛰어든 1중대는 거의 익사하고 말았다. 이 때 일본국 출신의 2중대 부관 마항용 소위(방위군), 철도원으로 사회경험이 있었던 김영재 선임하사 등이 기지를 발휘해 파도타기로 해안에 접근을 시도하고 물때를 잘 아는 선원들이 먼저 상륙 간신히 4개의 밧줄을 연결시켰다. 유격대원들은 밧줄에 목숨을 건 필사의 상륙. 파도에 휩쓸리고, 해안에서 날아온 인민군 총탄에 쓰러진 대원들이 부지기수였다. 장사리 해안은 돌연 총성과 포연으로 얼룩지며 모래밭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멀리 떠 있는 미 군함에 사격요청을 보내 함포지원을 얻음으로써 상륙이 가능했다.

이렇게 분전하기 10시간 정도, 사투 끝에 오후 3시경. 장사리 주요거점인 200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고작 10代의 꽃다운 학도의용병들

조국수호의 제물로 처절하게 떨어졌다.

대원들은 북한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거듭하며 중환자들을 좌초된 배 위로 옮겼다.

당초 예정된 3일간의 작전이 일주일을 넘기고 있었다. 유격대는 그곳에서 1주일 간을 버틴 것이다. 19일 새벽에야 또 다른 LST(조치원호) 한 척이 좌초한 문산호 북쪽 400m 해안에 도착했다. 대원들의 철수를 위해 보내진 함정이었다. 밧줄과 구명정을 이용한 철수작전이 한낮이 되도록 계속됐다. 밧줄을 놓친 대원들이 다시 바다 속에 잠기고 총탄에 맞아 떨어졌다. 인민군의 박격포탄이 집중되자 함장은 갑자기 밧줄을 끊어버렸다.

모래밭에 남은 대원 30~40명의 피맺힌 절규를 뒤로 한 채 조치원호는 해안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살아 떠나는 자와 적진에 남은 자. 모두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새까맣게 몰려든 인민군들이 배를 타지 못한 전우들을 포위하는 모습이 아득히 보였다.

이 전투에서 우리 의용군(비정규군)은 줄잡아도 2~300명은 이름도 없이 희생되었다.

장사상륙작전은 6·25 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한 양동 작전의 일환으로 학도병들이 소중한 목숨을 바쳤던 전투다. 장사상륙작전은 미 군사 전문가들도 성공 확률을 5천분의 1로 봤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했고 경주, 부산 사수와 서울을 수복하는 전세 역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던 작전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한 절체절명의 여건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생존자들이 문산호를 타고 부산(구포)으로 돌아오니 대기하고 있던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들을 향해 한다는 소리가 “너희들 어떻게 살아왔니?” 였다. 이는 엉겁결에 몇 명이라도 살아서 돌아온 것을 반기며 기특해 한 말이지만 그 이면에는 ‘다 죽을 줄 알았는데 너희들은 용케도 살아왔구나!’ 하는 의미가 포함되었음을 직감했다고 김 회장은 말했다. 생존병력은 재편성에 들어갔으며 보병 제9사단 28연대와 2사단 32연대 정규군으로 편입, 정전이 될 때까지 용문산 전투 등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특기할 일은 장사상륙작전에서 희생된 전사자나 부상자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는 없다. 군이나 정부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살아남은 자들은 그저 조국을 위해 싸웠고 대의를 위해 희생했다는 자긍심이 크지만 아무도 이들의 행적과 공훈을 몰라주는 것이 억울할 따름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1960년 10월 31일자로 되어 있는 맥아더 장군이 보낸 친필서신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귀하의 동지들이 수행한 전투는 혁혁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최고의 찬사를 받을만한 것이었습니다.//772유격대 동지들이 보여 준 용맹과 희생은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영원히 빛나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저는 그들을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전우로서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로 되어 있으며 이들은 이것을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장사상륙작전참전유격동지회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0년 고인이 된 당시 작전장교였던 최재명 회장과 선임하사였던 김영재 부회장 류병추 사무총장 등 노병이 주축이 되어 3년 가까이 각방으로 전우찾기를 벌였으나 얼마나 희생이 많았던지, 아니면 홍보부족이었는지는 모르지만 700여명의 참전자들 가운데 연락해 오는 전우가 없었기에 그 해 7월 4일 대구에서 38명으로 발족했다.

그리하여 전우들의 명예선양과 전사전우들의 영혼을 달래고 명복을 비는 위령제를

1980년 9월 14일 최초로 엄수하고 해마다 그 날을 기해 추모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1991년 장사포 해변에 작으마한 전몰자추념비도 세웠다. 그런데 안타까이도 기단 후면에 새겨진(명각) 인원수는 채 50명이 넘지 않고 작년 기자가 갔을 때도 참석한 노병 전우들은 20명 남짓에 불과한 것을 모고 깊은 상념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

조국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 놓고도 이름 세자조차 남기지 못한 무명의 영웅들, 그 원혼은 어떻게 달래주어야 하는지...

김영재 회장과 유병추 사무총장은 “이제 남은 전우도 20여명에 불과하지만 우리라도 살아있는 자의 의무로써 미리 가신 전우들의 혼을 달래주는 데 최선을 다 하여 생을 받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나 다행인 것은 지역 행정을 맡은 김병목 군수와 김관용 경북지사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장사전적지를 성역화하려 뛰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작년도에 국가보훈처로부터 120억원의 지원금을 받기로 결정되었고 여기에 경북 도비 70억원, 군비 50억원 도합 240억원의 자금을 확보하여 설계 중에 있으며 금년 들어 중앙에서 100억원의 추가예산을 받아 전국 최고의 현충시설을 건설함으로써 국가안보의 생생한 교육장으로 활용하려는 꿈을 실현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아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장사유격군 상륙작전은 역사의 엄연한 한 장으로 기록되고 기려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남강 kvn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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