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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금초:매년8월(양)마지막 일요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정부인(貞夫人) 안동장씨(安東張氏) 이야기

[고려동학(高麗洞壑)]      

貞夫人 安東張氏(1598~1680)는 高麗太師 貞弼의 후예인 敬堂 張興孝를 부친으로 안동 金溪里에서 誕生하셨다. 載寧李氏 가문에 출가하니 夫君은 石溪 時明이시다. 7남 3녀를 훌륭하게 길러내었으며 이씨 가문 3대에 四不遷位가 모셔지게 된 것도 부인의 공이 지대하셨다. 만년에 제3자인 葛庵 玄逸이 이조판서에 올라 貞夫人의 교지가 내렸다.


부인은 敎育家이며 賢婦人이며 詩人이며 藝術家로서 조선시대 여성가운데 모범적인 부인으로 繡帖, 詩帖, 遺墨, 飮食知味方 등이 전해 오고 있다.
’99년 11월 문화인물 기념사업의 하나로 전국 여성 서예 휘호대회를 개최해 온 본회에서는 올해로 15번째로 맞이 하고 있다.


안동 시내에서 서쪽으로, 풍산(豊山) 예천(醴泉)을 거처 서울을 향해 가는 길로 5킬로미터쯤 가게 되면 송야교(松夜橋)라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옛날 공민왕(恭愍王)이 안동으로 몽진(蒙塵)할 때, 안동 향민(鄕民) 부녀들이 노국공주(魯國公主)와 왕비를 뫼시는데 사람으로 다리를 놓아 건너게 했다는〈놋다리 밟기〉의 전설을 남긴 냇물, 송야천(松野川)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 이 송야천을 건너서 제방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 가다가 다시 포장도로를 따라 2킬로미터 정도 가게 되면 안동시(安東市)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다.
이 동리는 20호 정도의 집단취락도 없는 마을로 산밑에 5~6호에서 10호 정도가 옹기종기 모였으나 몇 채의 큰 기와집이 보인다. 이 곳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면사무소 못 미쳐 왼편에 몇 채의 기외 집과 정자가 있는 동리가 바로 금계동의 춘파(春坡), 봄파리 라는 마을이다.
정부인 장씨는 이 춘파, 옛날에 ‘봄파리’라 불리던 작은 마을에서 선조 31년 서기 1598년 11월 24일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선조 31년은 임진왜란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일본 침략군의 마지막 부대가 부산 부근 바닷가에 남아 발악적인 저항을 일삼고 있었다.
부인이 태어난 해의 11월은, 노량 앞 바다에서 쫓겨가는 왜놈 수군(水軍)을 무찌른 노량해전(露粱海戰)이 19일이고, 이 날에 충무공께서 전사하시었고, 25일은 소서행장(小西行長)과 모리길성(毛利吉成)의 최종부대가 일본으로 도망 친 날이니 임진왜란이 끝나던 날인 것이다. 이 임진왜란 종전(終戰) 전일에 장씨(張氏)가 출생했다.
임진왜란 즉 1592년 늦은 봄에 우리 민족의 역사에 가장 어려운 전쟁이 터지고 6년 8개월 동안 이 겨레의 위대한 저력(底力)은 침략자의 야욕을 무산시키고 왜놈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쫓아 버린 승리의 날인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너무도 큰 시련을 우리 조상님께 안겨 주었다. 문화적으로 후진이엇던 일본군은 우리 땅에 오르면서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으며, 100년간이란 긴 세월을 전쟁으로만 단련된 침략자 일본군은 200년 동안 태평을 누리던 우리 민족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고, 수많은 조선백성을 죽였고 다치게 했고, 그리고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우리 겨레에게 고난을 안겨 주었다.
국토의 곳곳에 전쟁에 시달린 자취가 그냥 남아 있어 민생이 피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역사상 가장 어려운 때에 정부인 장씨가 태어났던 것이다.
아버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는 외동딸을 낳은 때는 35살의 소장학자(少壯學者)였으며, 난리 중에는 향리의 많은 선비와 함께 의병을 모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전쟁터로 뛰어 다녔으며, 집안 살림은 전쟁의 북새통에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때이었다.


정부인 장씨의 출생지인 검재, 금계리(金溪里)는 오랜 역사를 가진 사림촌(士林村)이다. 한국 지방지(地方誌)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그 권위와 정확성을 자랑하는 영가지(永嘉誌)의 기록에다 조금 더하여 적어 본다.


『금지촌(金地村); 속명(俗名)은 금음지(今音知), 또는 금계(金溪)라 한다. 안동부에서 서쪽으로 20리에 있으며, 옛날부터 〈천년불패(千年不敗)의 땅〉이라 불리었고, 고려말의 명신인 사복정(司僕正) 배상지(裵尙志)가 살고부터 백죽당(栢竹堂)이 있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억울하게 죽은 용재 이종준(?齋 李宗準), 조선조 중기에 벼슬이 이조판서까지 오른 명신 마애 권예(磨崖 權?) 같은 분도 역시 이 곳에서 태어났고,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이 임하(臨河)에서 이 동리에 옮겨 와 살면서 마을 이름이〈검제〉로 고쳐지고 한자로는 금계(金溪)로 적게 되었다. 이 금계동의 20리 안쪽에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성씨(姓氏)인 안동김씨?안동권씨?안동장씨의 시조 묘소가 있어 그 곳을 능골(陵谷), 능골이라 부르며, 소백산에서 뻗어 나온 천등산(天燈山)이 보이며, 학가산(鶴駕山)의 영봉이 우뚝 솟았다. 동리 가운데를 뚫는 듯이 시내가 흘러 마을을 남북으로 나누고 있으며, 동리 모양이 거문고 같다해서 기금고 금(琴)과 제방 제(堤), 금제(琴堤)라 적기도 하며, 마을의 물이 맑고 산천이 예쁘고 아담하니 언제나 평화롭고 조용하여 늙은 분이 집집마다 살고 있으니 일향(一鄕)에서 부르기를 노인촌(老人村), 즉 복지촌(福祉村)이라 전하여 왔다.』



그런데 이 검재마을에는 지금부터 100 수10년 전에 용암(?庵) 김헌락(金獻洛 1826~1877)이란 분이 계시어 우리 나라에서 드물게 보는 마을의 역사 지리를 적은 책을 지었으니 그 이름이 금계지(金溪志)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를 참고해서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 친정(親庭)마을 자랑과 멋을 더 적어 본다.


첫째로 옛부터 금계(金溪), 검제마을은 ‘들을 검재이지 볼 검재는 아니다’ 라고 전해 왔다. 그것은 금계(金溪)의 명미(明媚)한 산수가 아담하기만 할 뿐 웅장한 모습이 아니고, 마을의 짜임이 집단취락(集團聚落)이 못 되고 이쪽 저쪽에 많아야 10여호 내외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였으니 열두검재, 사실은 22검재다. 그러나 누구던 이 마을에서 열흘만 지내보면 과연 검재마을 천년불패(千年不敗)의 땅인 것을 실감케 한다.
송야교(松夜橋), 솔밤다리에서 냇물을 따라 올라가면 몇 채의 기와집이 집이 보이는데 창열서원(彰烈書院)이 있는 솔밤 마을이다. 이 마을은 단계(丹溪) 하위지 선생(河緯地 先生)의 사자(嗣子) 원(源)이 좋은 터를 골라 살게 된 마을이고, 그 남쪽에는 향교촌(鄕校村), 교촌(校村)마을이 있는데 몇 채의 웅장한 기와집이 모인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올라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분으로 조선조(朝鮮朝)가 되어 태조(太祖)가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물러와 이 마을에 숨어 살아 청절(淸節)을 지켰던 권인(權靷)이 입향조(入鄕祖)다. 이 마을 남쪽에 발리봉(發理峰)이 내에 임(臨)해서 우뚝 솟았고, 조선조 중기의 대문장가이며 시인인 권호문 선생(權好文 先生) 암반벽(巖盤壁)에 집을 지어 한서재(寒棲齋)라 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금계동(金溪洞)의 첫 마을인 만운촌(晩雲村)이다.


이 마을에서부터 금계촌(金溪村)이 시작된다. 마을 북쪽에 가봉산(佳峰山)이란 봉(峰)이 있다. 금계촌의 산은 조금도 험한 기색이 없고 모두 곱고 부드러운 봉우리다. 멀리 상산(商山)이 보이고 알실〈지현(知峴)〉,판문현(板門峴),소복산(?福山),장등(長燈),향안현(響案峴),법현(法峴),복병산(伏兵山),중군산(中軍山),독산(獨山),예안현(禮安峴),진산(辰山),금산(錦山),모암(帽巖),입암(立巖),용암(龍巖) 등 그 이름처럼 독특한 모습을 갖춘 나즈막한 봉우리의 고개에 예쁜 바위가 이곳 저곳에 자리잡고 있다. 열두 검재라 한다. 아담한 집들이 두채에서 많으면 다섯채가 모여있는 마을들이니, 복당(福堂),사망(仕望),단정(丹鄭),알실〈지곡(知谷)〉,부룻골〈부로동(扶老洞)〉,동무지(東蕪地),텃골〈기곡(基谷)〉,금장동(金莊洞),효잠〈효자문(孝子門)〉,어평(於坪)?마니〈만운(晩雲)〉,경광(鏡光),작장곡(勺將谷),미산(眉山),번개〈번구(樊口)〉,뒷골,봄파리〈춘파(春坡)〉,가음동(佳陰洞),능골〈능곡(陵谷)〉,조화곡(造火谷),봉림(鳳林) 등 20여개의 마을을 총칭하여 금계촌(金溪村)이라 부른다. 거기에 더하여 성곡동(城谷洞)에 있는 마을 마을 대야곡(大也谷),옹곡(甕谷),귀여리(歸歟里)〈이개(耳開)〉,증거리(增巨里),보현(甫峴),봉림(鳳林) 등의 마을도 넓게는 검재 마을에 속한다. 이들 마을에는 재미있 는 전설이 있다. 「상산(商山)에서 태어난 말이 이개동(耳開洞), 귀여리에 내려와서 귀가 열리고 명동(鳴洞)에 와서 울었다고 이 명동(鳴洞)은 ‘말우리마을’이라 부리기도 한다. 또 봉림(鳳林)이란 마을에는 아주 멋있는 설화(說話)가 있다.


여말(麗末)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낸 백죽당(柏竹堂) 배상지 선생(裵尙志 先生)이 벼슬에서 물러나고 금계에서 처음 살게 되었다. 아드님을 네 분 두었는데 맡아들의 휘(諱)는 권(權)은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다음 항(恒)은 관찰사(觀察使), 셋째 남(楠)은 감찰(監察), 넷째 강은 이조정랑(吏曺正郞)을 지냈으며, 형인 휘(諱) 상도(尙度)도 등제(登第)하여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어른으로 그의 아들 둔(屯)도 역시 등제하여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으며, 아우인 상공(尙恭)도 등제(登第)하여 벼슬을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고, 그의 아들 소(素)도 등제하여 등제(登第)하여 이조정랑(吏曺正郞)을 지낸 여말(麗末),선초(鮮初)의 대단한 문벌(門閥)이다.


백죽당(柏竹堂)의 자제 항(恒),남(楠),강 삼형제가 소년시절 봉림(鳳林)의 죽림사(竹林寺)에 와서 독서(讀書)를 했는데 하루는 기생 셋을 불러 술을 마시며 놀았는데 백죽당이 갑자기 그 곳에 왔다. 갑작스런 부형(父兄)의 왕림에 놀란 항(恒) 등 자제 삼형제는 기생을 껴안고 이불을 덮어썼다. 이것을 목도(目睹)한 백죽당(柏竹堂)은 시를 읊어 벽에 적고 떠났는데 왈(曰),


『一裵一裵復一裵 裵哥 또 裵哥 또 裵哥, 裵哥만 셋.
三裵會處春風廻 裵哥만 셋이 모인 곳에 봄바람이 돌고 돌아.
名是竹林非但竹 이름은 竹林이라 한다지만 대나무 숲은 아니도다.
竹林深處桃花開 대 나무 숲 깊은 곳에 복숭아 꽃 피는구나.』



라고 읊었으니, 이것이 대개 옛날 금계인(金溪人)의 멋이었다.

이 검재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또 또는 만년을 보냈던 어른, 또 검재 마을과 인연이 깊은 명현(名賢)은 그 수가 50분이 훨씬 넘게 영가지(永嘉志)와 금계지(金溪志)에 실려 있는데 국사대사전과 한국인물대사전에 올려 있는 분이 10사람이 훨씬 넘는다. 이렇게도 많은 명사를 탄생시킨 마을이 나라 안에 몇이나 있을까?

『하위지(河緯地 1387 고려 우왕13~1456 세조2)
사육신(死六臣)의 한분이다. 자는 천장(天章), 호는 단계(丹溪),연풍(延風)이다,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담(澹)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하여, 이 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4년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가 되어 오예의주상정(五禮儀註詳定)에 참여했다. 1446년 동복현감(同福縣監)인 형 강지(綱地)의 탐간죄(貪姦罪)로 사직했다. 1451년 집현전(集賢殿) 중직(中直)이 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보좌하여 앞서 새로 정한 진설(陣說)의 교정과 역대병요(歷代兵要)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4년(단종2년)에 부제학(副提學),예조참의(禮曹參議)등을 역임하고, 1455년(세조1)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침착과묵한 성품으로 그 동안 집현전에 있으면서 왕의 측근에서 시정을 보필했으며, 세조의 간청으로 부득이 벼슬하는 동안 받은 녹을 먹지 않고 별실에 저장에 두었다. 이듬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등과 함께 단족복위를 꾀하다가 거사에 실패하자 체포되어 차열형(車裂刑), 수레에 몸이 찢겨 죽는 형에 처해졌다.
성미가 과묵하고 공손했으며 항상 집현전에서 경연에서 왕을 모시면서 학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 아들 호(琥)와 박(珀)도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그 때 둘째아들 박은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금부도사에게 청해 어머니에게 결별하면서 말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사옵니다. 아버님이 이미 돌아가시었으니 제가 어찌 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시집갈 누이는 비록 천한 종년이 되더라도 어머님은 지어미된 의(義)를 지켜 한 지아비만 섬겨야 한다는 의(義)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태연하게 죽음을 받으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해 마지 않았다. 대역의 죄인으로 멸문의 화를 당하는 만큼 아직 강보에 싸인 단계(丹溪)선생의 어린 조카 원(源)도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단계선생이 부리던 비복(婢僕)의 충성과 기지로 원은 죽음을 면하고 무사히 자라 후사를 잇게 된다. 금부도사가 선생의 들이닥쳐 가솔들을 끌어갈 때 마침 원과 비슷한 어린애를 기르던 여종이 자신의 아이와 원을 바꿔치기 하여 살려낸 것이었다. 그 뒤 단계선생의 충절을 기린 검재의 안동권씨(安東權氏) 문중의 종이 품에서 장성한 원을 사위로 맞아들여 선생의 후사를 잇게 했는데 그가 자리잡은 곳이 바로 검재 첫 마을인 솔밤마을이다. 과천(果川)의 민절서원(愍節書院),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안동(安東)의 창열서원(彰烈書院),의성(義城)의 충열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열공(忠烈公)이다. 』

『이종준(李宗準 ?~1499 연산군 5)
조선조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중균(中鈞), 호는 용재(?齋),용헌(?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민(太庭逸民),장육거사(藏六居士)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손자, 시민(時敏)의 아들이다, 5살에 글을 익혔으며 7살에 글의 대의(大義)를 통하였다. 13세에 문장이 이루어져 가슴 속 풍운(風雲)이 깨끗하고 시원하여 마치 선학(仙鶴)이 인간(人間) 세상(世上)에 있는 듯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 나아갔다. 1485년(성종16) 별시문과(別試文科)의 갑과(甲科)로 급제했다. 1487년(성종18)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일본사신의 호송관(護送官)에 차출되었는데 왜사(倭使)가 공의 서화(書畵)를 얻고 “비로소 천하의 중보(重寶)를 얻었다.” 고 기뻐했다. 이듬해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1492년(성종23)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수찬(修撰)이 되어 환취정(環翠亭)에서 임금을 뫼시고 시(詩) 지음 모임에서 공이 으뜸을 차지했다. 1494년(성종24)에 검상(檢詳)을 거처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이 되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가는 길에 중국 땅 어느 역관(驛館)의 병풍 그림을 보고 붓으로 그림을 모두 뭉개어 버렸다. 역의 관원이 통역을 불러 힐난함에 통역은 “우리 이서장(李書狀官}은 서화(書畵)를 매우 잘하는 분으로 그 그림이 너무도 변변치 않아 보였기에 그랬을 것이오” 했던 바, 그 관원이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 곳에 도착하니 깨끗한 소병(素屛; 글씨 그림이 없는 병풍) 둘을 꾸며서 펼쳐 두었기에 공이 그 하나에는 그림을 그렸고, 다른 하나에는 글씨를 썼는데, 그 솜씨의 절묘함에 보는 이들이 모두 탄상(歎賞)했다. 동 24년(1494)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서 녹봉을 털어 향교를 옮겨 세우고 교학(敎學)을 장려했으며, 경상도(慶尙道) 지도(地圖)를 제작하였으며, 이 곳 객관(客館) 남쪽에 문소루(聞韶樓)를 세워 기문(記文)을 지었으니 그 글은 널리 애송(愛誦) 되었으며, 공의 필적은 보배처럼 소중히 간직되었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史禍)에 부녕(富寧)으로 유배되어 가던 중 단천(端川) 마곡역(麻谷驛)에 이르러 벽에다 이사중(李師中)의 시, 【孤忠自許衆不與; 외로운 충성을 내가 넉넉히 해결할 일인 즉, 여러 사람과 더불어 행동하지 못하누나】의 시구(詩句)를 써 붙인 것이 불온하다는 혐의와 무풍정(茂豊正) 총(摠)을 무고했다는 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이듬해 사형되었다. 죽음에 임해서도 안색이 태연했으며, 소리를 가다듬어 “수양산(首陽山)이 멀거니 내 묻힐 땅이 어디냐!” 하고 눈을 감았다.
선생은 시문(詩文),서화(書畵),의약(醫藥),복서(卜筮)에까지 청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경연(經筵)에서 강론함에 한결같이 송유(宋儒)의 설을 쫓았고 바르고 굳은 지조는 옛 충신과 견줄만 했다. 그 좋은 말 어진 행신과 웅장한 문장과 튼튼한 붓놀임은 모두 사화(士禍)에 없어지고 용재집(?齋集) 한 책이 겨우 전한다. 중종 때 관직이 회복되고 숙종 때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안동 금계(金溪)의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

『권예(權? 1495 연산군 1~1549 명종4)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 안동이고 자는 경신(景信)이며, 호가 마애(磨厓)다. 1516년(중종 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같은 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검열(檢閱)에 이어 봉교(奉敎)가 되고,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일파 구원에 앞 장섰던 어른이다.
임금께 아뢰기를, “대신들이 도당(都堂)에 모여 국사를 처리하는 일은 마땅히 밝은 낮에 행함이 옳으련만 어제 일은 낮이 아니고 밤이었으니 낮은 양(陽)이고 밤음 음(陰)인즉 양은 군자(君子)에 속하고 밤은 소인에 속함에 또 북문(北門)은 거사할 곳이 아닙니다” 함에 임금은 대답을 못하였다. ‘이젯 밤 일’ 또 ‘북문’이란 바로 어젯 밤 한 밤중에 홍경주?심정 등 훈구파(勳舊派) 일당들이 비밀리에 신무문(神武門; 경복궁의 북문) 으로 들어가서 “조광조(趙光祖) 일당이 나라를 크게 어지럽힌다”고 밀고하고 처벌할 것을 청한 것을 말한다.
중종22년(1527) 이항(李沆)이 정승이 되니 공은 그 때 대간(臺諫)으로 그를 논박하여 멀리 귀양 보내기를 청했다. 이 무렵 허흡(許洽)이 장령(掌令)으로, 공과 함께 곧은 사람으로 알려졌다. 김극복(金克福)이 경연(經筵)에서 “권예(權?)와 허흡(許洽)이 바르지 못하니 물리치십시오 대신들에게 물으면 그 정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공은 “한 때의 이해도 무겁기는 하지만 만세의 명절(名節)을 어찌 버릴 수 있을 것입니까?” 라고 대답했다.
장령(掌令),교리(校理)를 거쳐 대사간,대사헌으로 있을 때, 삼간(三奸)과 삼흉(三兇)의 죄상을 상주하여, 중죄에 처하도록 하였다. 동 25년(1530) 에 직제학으로 있을 때 대사헌(大司憲) 김근사(金謹思)와 함께 심정(沈貞)을 격렬하게 탄핵했는데 그런지 며칠 뒤에 심정은 강서(江西)에 귀양갔다가 사사(賜死)되었다. 동 27년 간신들의 무고로 귀향했을 때 김안로(金安老)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음을 듣고는 “그사람은 전조(銓曹)의 장이 될 수 없으니 개체(改替)함이 마땅하옵니다” 고 상소했다. 고향 안동의 검재에 돌아 와 풍산(豊山) 건지산(?芝山) 아래 산수의 아름다운 낙동강 언덕에 낙강정(洛江亭)을 짓고 여년을 소요자적(逍遙自適)했다.
경상관찰사와 호조?형조?이조 판서를 지내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문집으로 《마애집》이 있다.
명종원년(1546) 공을 낙강정에 찾아 간 퇴계는,


小舟橫渡一江天 낙동강 푸른 물결 조각배로 건느면서,
草屋中間謁退賢 어진이를 뵈웁고저 草屋을 찾아 왔오.
上洛臺前千丈水 잔잔한 上洛臺 앞 천 길의 깊은 물은,
從今換作判書淵 이젠 그 곳이 바뀌어 判書 늪이 되었다오.』

『변영청(邊永淸 1516 중종12~1580 선조 13)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개백(開白), 호는 동호(東湖)이고,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부원군(府院君) 광(廣)의 아들이다.
하늘로부터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7살 어린 나이에 벌써 어른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문장을 지었다고 한다.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1546년(명종1) 진사가 되고, 154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임금에게 “성학을 밝히고 언로(言路)를 넓히며 기강을 세우고 백성의 공납을 덜어야 한다”고 상소하여 가납되었으며, 집의(執義)를 거처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아가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종에게 표리(表裏)와 안마(鞍馬)를 하사 받았으며, 1557년(선조11) 대구부사(大邱府使)에 부임하여서는 이 때 경상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 구휼에 성력을 다했다. 그리고 4년 뒤 청송부사로 옮겨 고을의 수재를 뽑아 학업을 권장하고,상의원정(尙衣院正) 등을 지냈다.
권호문(權好文 1532 중종27~1587 선조20)
조선조 중기의 학자이다. 자는 장중(章仲)이며, 호가 송암(松巖)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주(柱)의 아들로, 퇴계 문하생이다.
고려조(高麗朝)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으며 고려조가 끝나자 태조와 방원(芳遠)이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끝내 절조(節操)를 헐지 않은 권인(權靷)의 6대손이다.
1561년(명종16) 30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연이어 부모를 여의자 3년씩 여막(廬幕)을 지키고 관계에의 진출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기슭에 무민재(無悶齋) 연어헌(鳶魚軒)을 짓고 유유자적했다.
스승 퇴계께서 오시어 연어헌(鳶魚軒)에 시를 주시었으니,




少年遊蹟寄城山 소년은 靑城山에 기대어 지내며 책을 읽고,
形勝山川??間 산천의 형승 높고 먼데 그 사이에거 지내며,
白首喜聞棲息事 흰 머리에 학문 닦으며 숨어서 지내누나.
欲携書去更蹄攀 책 옆에 끼고 다시 그 산으로 오르는 구나.


만년에 덕망이 더욱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고, 집현전참봉(集賢殿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등과는 학행으로 깊이 사귀었으며 시가(詩歌)에 높은 소양이 있어 경기체가(景幾體歌)를 본뜬 독악팔곡(獨樂八曲)과 시조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을 지었다.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에서 세 수(首)를 옮긴다.


出하면 治民澤民 處하면 釣月耕雲.
明哲君子는 이랄사 즐기나니,
하말며 富貴危機라 貧賤居를 하오리라.

靑山이 碧溪臨하고 溪上에 烟村이라.
草堂心思랄 白鷗난들 제알랴.
竹窓靜 夜明月明한대, 一張琴이 잇나니라.

바람은 절로 맑고 달은 절노 밝따.
竹窓 松檻애 一点塵도 업사니,
一張琴 萬軸書 더욱 瀟灑하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벼슬 높은 벗들이 동락팔곡(獨樂八曲)을 지어 사양했다. 송암(松巖)은 당시 지나친 상고주의(尙古主義)와 허례(虛禮) 허명(虛名)에만 집착 구애(拘碍)된 감이 있었던 일반적인 선비의 경계에서는 시원히 벗어난 분이었다. 송암은 병이 위독하니 문병 온 문도에게 말하기를,
“ 내 이 병(病)은 명(命)이다. 어버이께 받은 몸을 온전히 돌아 갈 수 있게 되어 마음이 놓인다”
죽은 뒤에 문인들이 안동의 청성서원(靑城書院)을 세워 제향(祭享)했다. 』


『배삼익(裵三益 1534 중종29~1588 선조21)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여급(汝及)이고, 호는 임연재(臨淵齋)이며 본관은 흥해(興海)인데, 천석(天錫)의 아들로 퇴계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13) 생원이 되고 1564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학유(學諭)를 거처 1573년(선조6)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 풍기현감(豊基縣監),양양부사(襄陽府使) 등을 거처 1584년 교리(校理), 이듬해 사간(司諫)을 역임, 1587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무렵,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다닌 이들 가운데, 구실에 충실치 못한 사람들이 가끔 있어서 혹 방물(方物)을 길에서 분실하는가 하면 옥하관(玉河館)에 불을 내기도 했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상국(上國)인 명나라에 대해 그를 미안하게 여겨 진사(陳謝)하는 사신을 보내게 됨에 공이 뽑혀 1588년(宣祖 2l) 3월 길에 올라 북경을 다녀와서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588년(선조21) 황해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그 때 병이 있었음에도 조정에서는 백성을 구휼할만한 사람을 찾으니 공을 임명하니 부임하여 노곤(路困)을 풀 겨를도 없이 부임하여 크게 흉년이 들자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황(救荒)하는 일에 힘쓰니 몸소 민생의 실정을 살피기 위하여, 관하의 여러 고을 살피기 위하여 순시를 강행하다 병을 얻고도 관내의 순시를 강행중에 향년 55세로 객사했다.
공은 퇴계의 문인으로 배움에 독실했으며, 문장과 높고 힘찬 필법(筆法)이 있었다. 벼슬에 임하여서는 한결같이 삼가고 근실(勤實)했으며, 풍기군수로 있을 때 아전을 거느림에 엄하고 청렴 공직(公直)하여 정성으로 백성을 돌보아 다스리기 수년 칭소이 높았다.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부임하여서는 청간(淸澗)하고 관 후(寬厚)한 다스림으로 모든 폐단을 줄이고 구실을 덜어 피폐했던 백성의 살림이 훨씬 생기를 되찾게 되는 좋은 치적을 거두었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있을 때 어느 떳떳치 못한 자가 대사헌(大司憲) 자리에 오르게 됨에, 모두들 괴이쩍게 여기면서도 누구 하나 감히 말을 못하는 판이었으나 공은 혼자 나서서 의연(毅然)히 그 옳지 못함을 논하고 아울러 그 거짓 훈적(勳籍)을 깎아버릴 것을 제청하여, 드디어 바로 잡으니 사람들이 통쾌히 여겼다.
공이 명나라에 진사사(陳謝使)로 가서는 조선개국 이래 크게 말썽이 되어 오던 종계(宗系), 즉 명나라의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되어 있어, 조선에서는 여러 차례나 그 정정을 요구했으나 명나라에서는 고쳐주지 않았는데 1584년(선조17) 황정욱(黃廷彧)등이 바로 잡았던 것을 가져왔으며, 함께 명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로부터 포상(褒賞)하는 칙서(勅書)와 왕의 예복으로 용포(龍袍) 한 벌을, 그리고 공의 앞으로 옥적(玉笛), 앵무배(鸚鵡盃), 상아홀(象牙笏)을 상으로 받아, 귀국 복명하매 선조임금은 공의 노고를 위로하여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상으로 하사(下賜)했다. 공이 황해감사로 굶주린 백성을 구호하는 일에 힘쓰다 몸이 몹시 여위고 병이 중함에 그 아들 용길(龍吉)이 먼 고장에서 소고기를 구해 와서 드리니, 그에 앞서 공이 흉년으로 굶주린 관내에서는 소를 잡는 것을 금했기에,
“내가 황해도를 다스리는 장관으로 이미 백성에게 먹기를 금한 소고기를 비록 병중이라 한들 먹을 수가 있느냐”
하고 타일 물리쳤다.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은 공의 비명(碑銘)에서,
「그렇듯 음식같은 작은 절차에 있어서까지 죽음에 임해서도 그 뜻을 변하지 않으니, 이로 미루어 그 밖의 일에서야 알만하지 않으가」라고 했다. 』

『김성일(金誠一 1538 중종33~1593 선조26)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다. 자는 사순(士純)이며, 호가 학봉(鶴峯)이고, 관향은 의성(義城)이다. 진사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아들로 퇴계의 적전(嫡傳)을 이은 일세의 성리학자다.
문목공(文穆公)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찬(撰)한 묘방석(墓傍石)에 새겨진 글을 옮긴다.



『……무술년(戊戌年1538 中宗33)에 나서 계사년(癸巳年 선조26 1593)에 졸(卒)하였다. 무진년(戊辰年 선조1 1568) 문과에 뽑히어 본도(本道)를 안찰(按察)했다. 일본으로 사신(使臣) 가서는 정직하여 흔들리지 않아 우리 임금의 위엄(威嚴)을 멀리 오랑케 나라에 떨치게 했고, 병란에 초유(招諭)의 대명(大命)을 받고는 도민(道民)을 지성으로 감동케 하여 영남에 침노한 적을 제어(制禦)하여 막았다. 충성은 사직(社稷)을 보전(保全)케 했으니 이름은 조국(祖國)의 역사에 길이 실리리라. 일찍이 퇴도 이선생(退陶 李先生)의 문(門)에 올라 심학(心學)의 요도(要道)를 들었고 덕행(德行)과 훈업(勳業)은 모두 넉넉히 천백대(千百代)에 빛나리라.』





2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68년(선조1)에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봉교(奉敎)를 거처 1574년(선조7)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는 정언(正言)에 올라 많은 진취적 제언을 했다. 1577년(선조10)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 왔다. 그후 장령(掌令)?부제학(副提學),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여 목민관으로 크게 이룩한 바가 있었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실정을 살피고 귀국했다. 일본이 곧 침략할 것이라 보고한 상사 황윤길과는 의견을 달리했다. 그는 사신으로서 체모를 끝까지 잃지 않았고 일본의 위협에 조그마치도 굴한 바가 없었다.
황상사의 사행중 황겁지겁한 모습으로 일관한 당황망조(唐慌罔措)한 태도에 동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본이 꼭 처들어 오리라는 객관적 증거도 없었으며, 그 때 황상사의 귀국복명은 국내의 백성들을 크게 동요시키고 있었다.
16세기말 동북아시아 역사는 가장 어려운 국면(局面)을 맞았다. 왜추(倭酋)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자사(恣肆)에 의해서 발발된 대전쟁은 조,명,일(朝,明,日) 세 나라의 국력(國力)이 총경주(總傾注)되었다. 이 임진왜란에서 학봉선생(鶴峯先生)은 시대가 낳은 대전략가(大戰略家)이며, 지성과 애민(愛民)의 위인이었다. 퇴계 이부자(退溪 李夫子)의 수백(數百) 사우간(師友間)에 큰 촉망을 받아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중요한 계승자였고, 또 과거(科擧)로 발신(發身)하고는 소장관료(小壯官僚)로 국사(國事)에 전념(專念)하여 많은 소차(疏箚)로 행정시책(行政施策)을 개선했고, 백성들의 도현(倒懸)의 곤급(困急)을 해결하는 선진적 정책을 창출(創出)하여 국리민복(國利民福)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학봉(鶴峯)은 역사상(歷史上)의 인물로서 훼예(毁譽)가 상반(相反)된 정점(頂點), 일본사행(日本使行)에서의 귀국보고와 임진왜란에 있어서 숭고(崇高)한 구국활동(救國活動)은 육지전에서 초기의 영민(英敏)한 의병지휘(義兵指揮)가 이 전쟁을 승리로 종결(終結)토록 한 위훈(偉勳)이다. 위대한 민족의 수난기(受難期)에 조국수호(祖國守護)의「민중 영웅(民衆 英雄)」인 수백(數百)의 의병장(義兵將)을 산출(産出)시킨〈의병(義兵)의 아버지〉로서, 일세(一世)의 지도자(指導者)로서의 족적(足蹟)은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의 훈업(勳業)을 우리는 길이길이 숭배(崇拜)하고 있는 것이다.』

『배용길(裵龍吉 1556년 명종12~1609 광해군1)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琴易堂),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관찰사를 지낸 삼익(三益)의 아들 1585년(선조 8) 성균관에 입학, 159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대장(大將) 김해(金垓)의 휘하에서 부장(副將)으로 활약했다. 1594년 세마(洗馬), 이어 시직(侍直),부솔(副率)을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화의(和議)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으며, 1602년(선조3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충청도(忠淸道) 도사(都事)에 이르렀다. 김성일(金誠一) 문하에서 수학, 류성룡(柳成龍),조목(趙穆),남치리(南致利)등에게도 사사(師事)하여 천문(天文),지리(地理),율력(律曆),병전(兵典),의약(醫藥)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역리(易理)에 밝았다.
장흥효(張興孝 1564년 명종19~1633 인조11)
조선조 중기의 학자다. 자는 행원(行源), 호는 경당(敬堂), 본관은 안동(安東), 영가인(永嘉人)이다. 김성일?유성룡에게 배우고, 뒤에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문명(文名)이 높았다. 인조(仁祖) 때 음보(蔭補)로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전에 죽었다. 지평(持平)에 추증(追贈),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장씨(張氏 1598 선조31~1680 숙종6)
여류명사(女流名士)이다.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의 딸이며,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의 아내, 대성리학자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의 어머니, 10여세에 이미 문예에 통하여 배우지 않고도 능했다.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뛰어나 풍아(風雅)의 체(體)와 종위(鍾衛)의 법을 스스로 깨달았으나 한묵(翰墨)은 부녀가 하는 일이 아니라고 드디어 중지하였다.
그의 아름다운 필치(筆致)와 기묘한 서화(書畵)가 많이 전하지 못함은 모두 옛 우리의 겸양 겸손한 부녀의 도(道)를 지켰음이다. 특히 화접(花蝶; 꽃과 나비. 또는 꽃 사이를 나는 나비)과 낙화(烙畵; 인두로 지져서 그린 그림)에도 능하였다. 시문(詩文)에도 비상한 재질이 있어 수준 높은 작품을 남겼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니 동리의 젊은이를 의병에 떨쳐나갈 것을 호소하였다.
친정 아머니가 세상을 떠나니 아버님께 새어머니를 얻게 해서 친정에 자손이 있게 했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니 새어머님과 어린 친정 아우를 시집으로 데리고 와 키워 성인(成人)토록 했다. 요리에도 높은 기능이 있어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이란 동아시아에서 여성으로는 최초의 요리서를 남겼다. 남편을 섬김에도 높은 품위가 있어서 알뜰하게 남편을 도와 석계 이시명으로 하여금 후세에 대유(大儒)로 이름이 남도록 하는데 큰 내조가 있었다.
아들 칠형제를 모두 대학자로 키웠다. 초서(草書) 학발삼장(鶴髮三章), 참고서적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여류의 명화가(名畵家)로 실려있다. 실로 장부인은 효녀요, 효부요, 현모이고 양처이며, 평필이며, 문장가며, 화가며, 조각가요, 의술(醫術)에도 일가견(一家見)을 가진 여성일 뿐 아니라, 국가가 위난하니 의병(義兵) 창기(倡起)를 호소 했던 분으로 이 나라에서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와 함께 한국 여성의 사표요 불세출(不世出)의 여군자(女君子)로 불린다.

김진형(金鎭衡 1801년 순조1~1865년 고종2)
조선왕조 후기의 문신(文臣)이며, 자는 덕추(德錘), 호는 겸와(謙窩), 또 시호(詩號)로는 청사(晴蓑)라 했으며, 휘(諱) 종수(宗壽), 호 청송(聽松)의 셋째 아들이며, 학봉선생(鶴峯先生)의 10세손이다. 하늘로부터 타고 난 성품이 호탕하여 기질이 강직했고 총명함이 절인(絶人)하였다.
180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853년(철종4)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로 있으면서 이조판서(吏曹判書) 서기순(徐箕淳)의 배공당리(背公黨利)를 홀로이 탄핵하니 수찬(修撰) 남종순(南鍾淳)에게 몰려 한때 명천(明天)에 귀양갔다. 배소(配所)에서 명천에 귀양 간 내력과 배소(配所)에서의 생활한 기록을 가사로 지어 읊은 북천가(北遷歌)를 남겼으니 배소문학(配所文學)으로 지금 우리 국문학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64년(고종1년) 시폐(時弊)를 상소했다가, 조대비(趙大妃)의 비위를 거슬린 구절이 있어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다음 해인 고종2년(1865) 적소(適所)에서 서거하니 향년은 65세이다. 아들 회락(繪洛)은 병신년(丙申; 1896)에 의병을 창기하니 왜적(倭敵)과 싸우다 순사(殉死)했다.
시문(詩文)에 능하여서 시고(詩稿) 수권이 지금도 남아 있다. 』


『김흥락(金興洛 1827년 순조27~1899년 광무3)
조선조 후기의 문신(文臣)이며, 호는 서산(西山), 또는 병옹(病翁)이라 자칭했다. 학봉선생의 11대 종손이며,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의 문인으로 학덕(學德)이 높아 근세 영남 유림에서 빼어난 존재로 1867년(고종4) 음관(蔭官)으로 기용되었으나 취임은 하지 않았고 위에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지평(持平)이 되고 승지(承旨)에 이르렀으나 취임하지를 않았다.
선생이 태어나기 전날 밤 아버지 꿈에 한 늙은 스님이 나타나,
“지금 귀한 아들이 태어날 것입니다. 저는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리는 중입니다” 라고 일일렀다 한다.
태어나면서 기골이 비범하고 총명이 뛰어나 목소리가 우렁차고, 눈이 샛별 같아 예사롭지 않았다. 6살에 사략(史略)과 당시(唐詩)를 읽으며, 하루는 커다랗게 새 한 마리를 그려 놓고,
“날면 하늘을 찌를 것이오,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飛則衝天. 鳴則驚人)” 이라 커다랗게 쓰니 어른들이 어리둥절했다.
1866년(고종 3) 겨울 전학수(全學洙)라는 신임부사가 아전들과 결탁하여 민폐가 심하였다.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다. 겁을 먹은 부사는 향청(鄕廳)으로 달려가 무마할 방책을 물었다. 듣는 이가 “서산선생(西山先生)이라야만 수습이 가능하리라” 했다.
부사는 서산을 좌수(座首)에 천거했으나 공은 굳이 사양하다가 “우리 고향에 민란(民亂)이 난다면 사대부(士大夫)의 고을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하는 부로(父老)들의 권유와 부사(府使)의 간청(懇請)으로 읍(邑)으로 들어 가니 난동을 이르킨 읍민(邑民)들이 모두 반겨하고 피란 갔던 읍민들도 돌아 오며, “금계(金溪) 나으리께서 나오셨으니 이젠 됬다” 고 환호(歡呼)했다.
서산(西山)은 뜰 아래에서 애원하는 부사에게 “민정이란 순리로 임하면 잘 따르고, 거스르면 반발하는 것이니 깊이 반성하고 잘 효유(曉諭)하시오” 라고 부사를 깨우쳤다. 저녁 무렵이 되니 몽둥이로 몰려든 난민들의 기세가 자못 험악했는데, “곧 모든 폐정(弊政)을 고치게 할 터이니 물러가 기다려 주시오” 라고 사문(四門)에 방(榜)을 걸고, 높은 다락에서 외치게 함에 격앙했던 군중들이 몽둥이를 던지고 흩어졌다, 선생은 즉시 폐정의 근원을 샅샅이 지적하여 즉시 고치도록 했다.
초야에 숨어 살며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니 배우려 찾아 오는 이가 끝이 없었다. 때는 1894년(고종31) 왕권(王權)이 흔들리고 일제(日帝)의 행자가 갈수록 심해져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갑오변란(甲午變亂)이 일어나자 선생은 7월에 나라 안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창의(倡義)하여 상주 함창 태봉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하였다. 이를 태봉전투라 부른다.
1895년(고종32) 8월 미처 날뛰던 일제(日帝)가 국모(國母)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한 을미왜변(乙未倭變)이 발생하자 서산선생은 문도 100여명을 데리고 신래이래의 호국대찰(護國大刹)인 봉정사(鳳停寺)에 들어가 머리를 풀고 망곡(望哭)을 하며 왜놈의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서(盟誓)하였다. 이 해 12월에 나라 안에서 처음으로 「안동통문(安東通文)」을 영남지방 유림에게 돌렸다. 그 통문 끝에 “……아! 이몸이 한번 죽으면 오히려 의(義)로운 귀신이 될 것이나, 이 머리를 한번깎이면 영원히 오랑캐의 종이 될 것이니, 각각 마음에 맹서하여 대의(大義)를 붙잡을 지어다” 라고 왜쳤다.
서산선생(西山先生)은 의병을 이끌고 안동관찰부(安東觀察府)를 공격하여 12월 3일 안동부를 점령하였다. 이것이 을미의병(乙未義兵)의 처음이다. 안동부를 점령한 뒤에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를 의병대장에 추대하였으니 이것이 병신의병(丙申義兵)이다.
서산은 항상 문도들에게 「敬以直內 義以方外」즉 “경(敬)으로서 마음을 바르게 갖고, 의(義)로서 행신(行身)을 바르게 하라” 고 가르쳤다.
서산선생의 문도(門徒)로 독립유공훈장(獨立有功勳章)을 받은 분이 60명이 넘는다. 그러나 나라가 위난할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치는 것은 선비된 당연한 도리라고 가르쳤으니, 서산선생문집(西山先生文集)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글은 한편도 없다.
1899년(고종36) 10월 11일 본가의 풍뢰헌(風雷軒)에서 오시(午時) 고종(考終)하시니 향년(享年)은 73세이다. 』



안동 장씨(安東 張氏)는 먼 옛날 중국 당(唐)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신라로 건너 온 장정필(張貞弼)이라는 학자가 공자의 화상과 70제자의 위판을 가져 왔으며, 또 많은 경전(經典)과 문적(文籍) 그리고 국학도(國學圖)를 가져 와서 인동(仁同)에 살면서 많은 제자를 기르다가 안동으로 옮겨 와 살게 되었다.
그 시대에 안동에는 세 문중의 호족(豪族)이 살았으니 안동 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 안동 권씨의 시조 권행(權幸)과 안동 장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 등 세 분이다. 신라의 쇠망기(衰亡期)가 되어 경순왕 4년 고려 태조 13년(930)에 왕건의 군사가 후백재의 군사를 크게 무찔러 고려가 나라를 세우게 되는 큰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공로로 안동이 고창군(古昌郡)에서 안동부(安東府)로 격이 오르게 되었다.
장정필(張貞弼)은 삼중대광(三重大匡) 아보공신(亞父功臣) 태사(太師)의 벼슬을 받았다.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 선생의 6대조되는 장의(張儀)라는 분은 후릉(厚陵) 참봉(參奉)을 지냈다. 고려말에 나라가 어수선하니 시조 묘소가 가까운 이 마을로 옮겨 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마을 뒷편에 재월대(齋月臺)라는 큰 바위가 있어 풍광이 아름답고 운치가 있어 경당은 거기에 광풍정(光風亭)이란 정자를 지어 많은 문도와 함께 학문을 토론하며, 또 철학적인 이론을 강론하면서 천석(泉石)을 벗삼으면서 후학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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